[문예마당] 평양에서 찾은 기적의 미소
미국에서 간 의료진 17명이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내려 한동안 기다리게 되었던 날은 2006년 5월 3일이었다. 대부분이 초행인지라 모두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고 잠시 기내에 머물게 되리라는 안내방송은 오히려 불안한 마음을 더욱 끌어올렸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창밖으로 보이는 ‘평양순안비행장’이란 글자가 북한에 온 사실을 확인해 주는 순간 이번 여행을 반대하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행히 이윽고 탑승객들이 기내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도 별 문제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터미널을 향해 약 2~3분 정도 걸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북한 외무성 산하 ‘해외동포위원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앞으로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안내를 맡았다고 소개했다. 곧 승합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양시내 ‘고려호텔’. 방 배정과 룸메이트가 정해졌다. 나는 23층 25호실에 시카고에서 온 닥터 고와 한방을 쓰게 됐다.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23층에서 내려 방을 찾는데 복도 역시 어두워서 찾기 쉽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오니 다소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우린 조심스레 창밖으로 평양시내를 내다보며 아직도 불안과 걱정스런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여장을 풀었다. 다시 호텔 로비로 모인 일행은 조금 전 만났던 안내원들과 정식인사를 나눴다. 평양 일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한결 분위가 부드러워졌다. 평양이 먼 곳이 아니라 서울에서 불과 3시간 거리에 있다는 현실을 의식하며 평양에서의 첫 밤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일정이 오전은 '평양과학의학학술회의' 그리고 오후에는 병원이나 의료시설(결핵요양소, 암센터, 치과재료공장 등등)을 방문하는 것이다 보니 주로 시내를 돌며 간간이 북한 명소들(능라도 경기장, 모란봉과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변의 푸에블러 미군 함정 등등)도 보면서 관광까지 겸하는 스케줄이 되었다. 함께 따라다니는 북한 안내원들과 가까워지며 여러 차례 함께 식사하다 보니 낯섦은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하루는 안내원 S와 마주 보며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주문하자 그도 같은 메뉴를 선택해 뜻밖의 호감을 느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 만난 미국인과 사귀는데 3년 이상이 걸리는 시간을 단 3분도 채 안 되는 짧은 만남 속에서 친분을 나누는 경험을 하게됐다. 그런데 우리들이 맛있다고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식당을 나오는 그의 모습을 눈여겨보게 됐다. 나의 직업본능을 발휘해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일어선 이 안내원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위 어금니 2개와 왼쪽 아래 어금니 3개를 잃어 음식을 잘 씹을 수 없었다. 나는 치아이식, 브리지, 부분 틀니 등 복구 방법을 제안했다. 그중 가장 현실적인 것은 부분 틀니였다. 그 생각을 S에게 전하니 매우 주저주저하며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것을 정말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눈치였다. 물론 나도 30여 년의 의사경험 중 이러한 경우는 없었다. 치료는 최소한 30일이 필요한데 평양에 그렇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환자 구강 상태의 인상을 떠서 석고 모형을 미국에 가져가 제작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평양과학의학학술 회의에서 만난 북한 치과의사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난감한 표정이다. 그래도 나의 지속된 설명에 감동이 되었던지 해주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출국하기 전날 S의 구강상태를 그대로 복원시킨 석고가 든 박스를 받았다. 석고를 살펴보니 S는 오른쪽 위 어금니 2개와 왼쪽 아래 어금니 3개가 부족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의료진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그 맛있는 된장국도 비빔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박스를 귀국짐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오다가 북경공항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세관원이 내가 손에 들고 오는 박스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차! 싶었다. 틀니 만드는 특수액체를 북한에서 얻어 온 것이 문제였다. 그 액체의 휘발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솔린보다 훨씬 더 높아서 미국에서도 항상 취급주의가 요구되는 치과재료 중 하나다. 중국 세관원은 그 액체를 자기가 쓰던 재떨이에 붓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펑하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그 재떨이는 순식간에 불덩이가 됐다. 지켜보던 나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나는 불법 소지물을 갖고 여행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중국세관원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니 등에서 땀만 흐르고, 우리 일행들은 비행기 환승편으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진퇴양난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옥신각신 끝에 그 세관원에게 그의 상사와의 대화를 요청했다. 조금 기다리니 한 젊은 세관원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그는 대화가 가능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나는 이 책임자에게 나의 신분과 그리고 북한에서 있었던 일 중 한 불쌍한 환자를 알게 되어 그를 도와주려는 차원에서 불법적인 것도 모른 채 그 액체를 받아서 오게 된 경위 등등을 말했다. 순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걱정 마세요(You are a good person. Don't worry about it!)”라고 날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상자를 더 큰 상자에 넣어 미국까지 무사히 오게 해주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기공소와 연락해 S를 위한 부분 틀니 2세트를 주문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환자의 틀니를 만들 때는 4~5차례 병원 약속을 하면서 환자의 입안에서 잘 맞는지 또 말은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음식은 잘 씹을 수 있는지 등등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절차를 내 상상 속에서 진행한 후 틀니를 완성했다. 그리고 LA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L의사 편에 틀니를 보냈다. 그 후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L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평양을 다녀온 그의 첫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평양에서 난리가 났었어! 남 박사가 만든 틀니가 환자에게 너무나도 잘 맞아서.” 전화기를 잡은 내 손이 떨렸다. 그 한마디에 평양에서의 모든 경험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섭리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70년 이상 단절되었던 민족 동질성이 잠시 회복된 듯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남영한 / 은퇴 치과전문의문예마당 평양 기적 평양과학의학학술 회의 평양 일정 평양 순안